[뉴스부산ART] 부산여류서예인회 제산 신은숙 고문 (2)- 뉴스부산ART=부산서화단(釜山書畵壇)을 만나다(3)
[뉴스부산art] 부산서화단(釜山書畵壇)을 만나다 (3)
[뉴스부산ART]들어가면서=예술(藝術)과 생활(生活)의 경계(境界)가 사라지고 있는 지금, 서예(書藝)는 동시대(同時代)를 반영한 생활예술(生活藝術)이자 현대미술(現代美術)로 우리 앞에 서 있다. 서예의 '예술과 가치(價値)'로 규정된 '전통(傳統)과 계승(繼承)'은 이제 '창조(創造)와 발전(發展)'이라는 담론(談論)과 직면(直面)하고 있다. 이를 위한 본격적 논의에 앞서, 이번 '부산서화단(釜山書畵壇)을 만나다'에서는 중진·원로 작가와의 대화를 통해 핵심적인 '서단의 활동을 짚어보고, 서예에 대한 서예인으로서의 자세 등을 엿보고자 한다.글·사진 강경호(예술감상전문가)
■부산여류서예인회 고문,제산 신은숙(霽山 申銀淑) (2)
2001년은 여류 서예인 활동이 그리 많지 않던 부산 서단에 여성 서예인들의 모임 등이 결성되면서 여성 서예가가 기지개를 켤 수 있었던 토양이 마련된 시기였다.
외형상으로 상호 교류와 창작 활동의 든든한 울타리가 된 지금의 부산여류서예인회와 부산여성작가회가 당시 연이어 발족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용을 추구하고자 하는 젊은 여성 서예인들의 실험정신이 현장에 활착 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오는 6월 17일부산여류서예인회 창립 20년을 앞둔 지난달 초, 초대·2대 회장을 역임한 제산 신은숙 고문을 만나 여류서예인회의 설립 배경과 활동, 서예 입문과 정진, 서단과 서예에 대한 단상 등에 대해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눴다.
이날 대화는 코로나19 예방 수칙을 준수하였으며, 사진 촬영 시 마스크를 벗고 진행했다. 인터뷰는 독자의 편의를 위해 질의응답 형식으로 2회에 걸쳐 게재한다.
☞ 출발부터가 구성원들의 의욕과 투지에 공감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특별히 중점을 둔다거나 주력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시류에 끌러가지 말고, 우리끼리 정말 제대로 한번 해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실력을 떠나 하고자 하는 의욕이 컸던것 같습니다.
먼저 '전시라는 흔한 것에서 벗어나자, 우리는 좀 다르게 가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류 서예인이 드물던 시절이라 초기에는 전시회보다는 '부산역 1 가족 1 가훈(2002년)'을 시작으로 실용 서예와 사물 등 예술의 융합을 통한 서예퍼포먼스를 진행했습니다. 액운을 던진다는 의미로 글을 써붙인 독을 깨트리면서 '아~ 서예가 이런 부분도 있구나'라며 모르는 사람들과도 같이 호흡하고 참여하는 차원에서의 서예를 표방했던 것입니다. 뒤 이어 유적지 퍼포먼스, 연하장 발표회, 문화탐방 등의 활동도 진행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주제를 가지고 전시를 하되 충분한 연구기간을 갖자는 것이었습니다. 첫 부산여류서예인회전 '묵행(墨行)'은 창립 7년이 지난 2008년에서야 부산문화회관 대전시실에서 '대학'을 주제로 개최했습니다. 여기서 '墨行'은 '묵의 행진', '묵으로 즐기자'는 뜻으로 백서 자전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어 제2회 전시회 '중용에 도를 묻다(2011)', '제3회 논어 인과 덕에 놀다(2014)', '제4회 휴편안하거나 아름다운(2015)', '제5회 선류 풍류(2016)', '제6회 맹자의 숲을 거닐며(2017)'를 개최하고, 지난 2018년에 '시경 일상을 품다'를 주제로 일곱번째 회원전을 열었습니다."
☞ 제7회 '부산여류서예인회전'을 마치고 이듬해 개인전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특별히 전시를 위해 현장을 방문하셨다더군요.
"지난 2019년 12월 시민공원 다솜관에서 '81 노자 말씀'이라는 주제로4번째개인전을 가졌습니다. 2013년 전시 이후 6년 만이었죠. 이전에는 장자의 호기를 좋아하다가 나이 들면서 81장 5천여 자로 구성된 도가 사상이 담긴 노자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러다 노자를 읽다가 심취하면서 대학에서 공부하던 사람들과지난 2018년 여름방학에 낙양을 갔다왔습니다. 노자 고가도 방문하고, 마지막으로 '도덕경'을 집필했다는 함곡관(函谷關)도 방문했습니다. 노자를 현장에서 피부로 더 느끼고 싶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작업을 결심하고, 마음속으로 늘 노자를 생각하면서 어떤 문장을 쓸까하며 계속 고민해왔습니다. 작품은 1장(道可道非常道)에서 81장(信言不美 美言不信)까지 각 장마다 소품 작업이었는데, 마음의 준비 기간에 비해 실상 작업은 금방 끝났습니다."
신 고문은 현장의 풍경이 먹빛에담겨진 81점 중 인상적인 한 작품을 소개해 달라는 필자의 요청에 '노자 제63장' <味無味>를 일러 주었다. 작품에 쓰여진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도는 입에서 나오되 /담담하며 그 맛이 없듯 /그 말씀도 담박하여 /맛이 없다 고로 /맛 없음을 맛으로 /삼는다
☞ 지난해부터 지금까지 코로나 시기인 요즘 서예 활동은 어떠신가요. 어떤 분에게는 위로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만, 요즘 근황도 알려주시죠.
"여기 공부하러 오시는 분들이 말씀들 하시더군요. 이 코로나 시기에 붓글씨를 안 썼으면 어떻게 했겠느냐고. 저 역시 글씨를 쓰며 그림을 그리며 위로했습니다. 그러면서 한글이 주는 즐거움이라 할까흥얼거림이 다 글이 되는 한글에 매료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재작년까지는 저가 공부했던 부산대 예술대학에서 시·서화를 강의했습니다. 가르친 것은 몇 년 안 되지만 공부하고 여러 사람과 교류하다 보니 서예라는 어떤 골 깊고 내밀한.... 깊고 깊은 선을 타고 쭉 앞만 보고 달려오다가 '서예의 확장성'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이 서예 먹빛을 어떻게 확장해 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 그러고 보니 창작에 있어 좋고 나쁜 시기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임서(臨書)라고 하죠. 이 자습서 외에도 작가라면 양보할 수 없는 작업이나 창작에 있어 어떤 영감이라든지 참신한 발상 전환을 고문께서는 어떻게 채우시는지 궁금합니다.
"대개 책이나 문장을 통해서입니다. 그렇다고 작품을 하기 위해 책을 찾고 이거보다는 평소 좋아하는 우리 글이나 시를 읽는다거나. 아니면 좋은 단어가 생각났을 때 붓을 잡게 됩니다. 저는 주로 그렇습니다. 특히 TV를 보다가도 빨리 메모하는 습관이 있는데, 그래서 TV 앞에는 항상 수첩이 있습니다. 의외로 좋은 말이 많이 나오거든요.
한편으로는 타인이 도록을 보내왔을 때입니다. 읽어보고 '나는 이렇게 표현해보자. 이런 것도 있네. 아 이 산 너무 멋지게 했다'는 식입니다. 또 흉내도 내보고... 혼자 '호작질'이라고 하죠. 그런 장난을 쳐보곤 합니다."
☞ 운명 같은 '서예와의 만남'은 어디서 시작되었던 것입니까?
계셨던 부친께서 서예를 즐겨하셨습니다. 편찮으셔서 시골에 오시게 되었는데 동네 사람들을 위한 입춘첩(立春帖)를 쓰거나 친구분들과 시어를 쓸 때, 저는 먹을 갈아주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고등학교 1학년 미술시간, 이젤에다 스케치북을 세워놓고 그리는 모습을 처음 접하며 어떻게 그려야 할지 어려워하다 수채화 붓으로 '몰라 어렵다. 신은숙'을 썼는데, 이를 본 선생님이 저를 불러 '글씨 쓴 적 있느냐'고 물어보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닙니다. 초등학교 습자 시간에 쓴 거밖에 없습니다'라고 하니, 저를 안동 서도협회 그러니까 서예원에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때가 4월이었는데 6월까지 3개월을 배웠습니다.
7월 여름방학 때 고향에 내려가 부친께 선생님이 붓하고 다 사주시고 서예 공부를 했다고 말씀드렸더니 진학도 해야 하고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하시며, 봉투에 편지와 재료비를 넣어 선생님 갖다 드리라고 하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 당시 미술 선생님이 일찍이 재능을 알아보신 것이군요. 그러면 서예는 부친 말씀대로 진학 후에 하셨습니까?
"사정상 저는 바로 진학을 못하고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서예와 인연이 없었을 것 같았던어느 날, 저를 서예원에 데려가 주셨던 그때가문득 떠올랐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래 우리 선생님이 그 많은 학생 중 나를 데려갔으니, 뭔가 있으니까 데려갔겠지 그냥 데리고 가시지는 않았을 거다'라는 생각이 저를 다시 서예로 이끌어왔던 것 같습니다."
☞ 흥미진진해지는군요. 서예를 본인 의지대로 다시 시작한다는 것인데, 직장 다니며 공부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군요.
"마산에 첫 발령을 받아 처음에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학원에 다녔습니다. 1981년 부산으로 전근을 와서도 학원을 다녔는데, 더 깊이 공부하고 싶다는 갈증을 느껴 주말마다 서울로 몇 년을 공부하러 다녔습니다. 힘들다기보다는 마음이 편해지더군요. 지난 1984년이었습니다. 직장을 그만두고 '글을 써야겠다'고 결정을 내린 해였습니다.
사실 그사이 직장 생활하면서 차(茶) 공부도 하고 많은 것을 했거든요. 심지어 찰흙, 지점토를 했는데도 다시 서예로 돌아가더군요. 그래서 '여기에 제대로 해야 하는가 보다. 운명적인가 보다'라고 마음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글씨 공부를 하면서도 국전 등 전시 관람을 많이 다녔습니다. 故 삼문 우성화 선생, 근원 김양동 선생, 창현 박종화 선생, 마산에는 문정숙 선생께 사사했습니다."
☞ 지난 1984년이 인생의 전환점이었던 시기였군요. 서울까지 가게 된 결정적 원인은 무엇인가요. 안정적인 공무원을 그만두고, 불투명한 전업작가로 뛰어들기까지 주변의 반대는 없었나요.
"어느 날 시골집에 내려가 우연히서예 관련 예술지에 실린 사진을 보았는데, 힘차게 쓰인 예서에 마음이 동하게 되었습니다. 근원 김양동 선생의 작품이었는데, 알고 보니 부친께서 제자였다고 하시더군요.부친께 소개해 달라고 말씀드리고, 그해 가을부터 서울 나들이가 시작된 것입니다. 거의 주일에 1번씩 몇 년을 배웠습니다. 부산서 공부한 것과 너무 달랐습니다. 갈등의 시기였지만, '그래 바로 이거다'라고 서예가로 결심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던 시기였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부친과 가족들의 반대가 많았습니다, 막내였던 저를 걱정하셨던 것인데, 뒤에는 격려해 주셨습니다. 전포동 성북초 인근에 부친이 지어준 '푸를 청(靑), 언덕 구(丘)' 청구서예학원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 작가에게 소중하지 않을 작품은 없을 것이라 봅니다만, 그래도 서예에 관심을 가진 분들에게 '좋은 작품'과 '훌륭한 작품'에 대한 의견을 들려주신다면.
"좋은 작품과 훌륭한 작품을 구분 짓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는 전시장을 누구보다 많이 가는 편인데 저의 경우, 좋은 작품은 결국 내가 좋다고 느꼈던 것이 훌륭한 작품일 때가 많았습니다. 이를테면 전시장에서 '아 작품 괜찮네'라고 느끼며 그곳에서 발걸음이 오래 머무는 작품, 발을 다른 곳으로 바로 옮기기가 쉽지 않을 때, 그런 작품들이 좋기도 하고 훌륭하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때는 사진을 찍어오기도 하고, 또 그 한 작품을 위해 도록을 사 올 때도 있습니다.
☞ 전시장을 자주 가신다고 하셨는데, 장르의 다양성에서 오는 새로운 시선과 느낌이 주는 감동이 있을듯합니다만.
"저는 서예가 문자를 가지고 써나가는 써내려 가는 것이니 처음엔 데생하듯이 보고 쓰기만 하고, 그러다가 약 20년 공모전에 빠졌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의 틀이라 볼 수 있는 공모전에 빠져 글씨를 계속 쓰고 또 기초를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하다 보니까 전형적인 제 작품에 대한 것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15~20년 지난 이제 창작에 눈을 뜨다 보니 많이 딱딱해져 있더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 문자를 가지고 어떻게 하면 끓고 있는 내면의 것을 표현할까. 그런데 붓과 종이로만 너무 힘이 들고, 다른 것을 보고 시선을 좀 돌리고 왔을 때, 좀 더 글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부분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여백이라든지 불균형 속에서 균형이라든가를 찾아볼 수 있는 공간이자 학습의 장인 셈입니다."
☞ 이번에는 '서단'으로 화제를 돌려보겠습니다. 서단 관련해서는 조금은 무겁고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는 부분이라 특정 주제 등에 대한 논의는 별도 자리에서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평소 '서단'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어떤 말씀이든 한 두어 개 들려주시죠.
"부산 서단을 이야기하자면 서단뿐 아니라 후배들이 거의 없는 것이 안타까운 일입니다. 서예는 글을 쓰는 것이고, 또 자기 작업에 대한 소중함을 지키며 잘해오고 왕성한 활동을 하는 선배도 많으나 그것은 개개인의 것이고, 서단이라는 큰 단체를 이야기하자면 어떻게 하면 후배를 양성해 이어갈지 고민입니다. 몇몇 후배 친구들이 모이면 술 한 잔 하며 그런 고민을 합니다. 그대들이 마지막 주자가 될까 겁이 난다고. 숙제이자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단정적인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 젊은 작가는 생각도 다르고 화선지에 글을 표현하는 것도 다릅니다. 우리는 보이고 읽어지는 것을 표현한다면 그들은 읽어지는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냥 봐 달라. 못 읽으면 어때'라는 식이죠. 그래서 이들을 만나보면 이게 옳다가 아니라, 그렇게 옮겨가는 과정에 신서예를 보여주고 느껴지고, 읽을 수 있는 것을 저는 이해하려 합니다."
☞ 앞서 '서예 먹빛의 확장'과 관련해 고민하고 있다 하셨는데, 구상하고 있는 계획이나 검토 중인 활동이 있으면 말씀해 주시죠.
"서예도 며칠 전시만 하지 말고 '하루 전시해서 무대에 세워보자'는 생각, 그리고 일반인들이 서서 보는 것이 아니라 관객석에 앉아서 본다거나 하는.... 우리 여류서예인회를 통해서 음악·춤(전통과 현대) 등과 더불어 융합된 서예의 어떤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논의 중에 있습니다. '서예 무대에 서다'라고. 가령 국악원이라든지 음악과 더불어 무대를 활용한 여러 가지 기획이죠, 그런 활동 계획을 늘 염두에 두고 생각해 왔습니다. 혼자 작업으로서는 너무 크고 힘들 것 같아 못했던 것이었거든요."
☞ 혹여 서예를 도외시하고 보여주기만을 위한 형식에 치우친다는 우려는 없을까요. 이를테면 서예가 어려워지고 일상과 더 멀어지는 전시 행위라고나 할까요.
"저는 하나의 '자신감'이라고 봅니다. 그러면서 먹을 대하는 겸손함도 보여주고 싶은 것이죠.사실상 종이에 먹을 묻히는 서예가 일회성을 가장 잘 나타내려면 전통의 뿌리를 가지고 자기 마음 안에 깊이 스며있어야 무대에서 한 필을 제대로 그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전통 서예의 뿌리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묻혀 가는 우리 서예를 밝히려는 몸부림이라 할까. 그러면서도 같이 융합해서 같이 해 나갈 수 있는 이 시대에 맞는 그런 예술 형태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 우리 서예를 밝히려는 노력이 결실을 보았으면 합니다. 끝으로 드리는 질문입니다. 앞서 많이 논의되었던 내용이기도 합니다. 신 고문께 '서예란' 무엇인가요?
"서예란 문학적 요소, 조형적 요소가 동시에 공존하는 것이며 동양적 사유의 특성을 학문과 예술의 집합체로 묶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만든 문자로 정신세계를 펼치는 조형예술인 셈이죠. 말하자면 단순한 붓놀림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며 먹의 농도에 따라 무한히 달라지는 색감·종이·붓의 성질이 서로 연관되어 글씨의 느낌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조형미 율동미 추상미가 함께 내포되어 있으며 작가의 개성이나 심리까지 표현된 종합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